필사, 제대로 하면 인생이 바뀐다: 형임·의임·배임 3단계

필사, 제대로 하면 인생이 바뀐다: 형임·의임·배임 3단계

3년 전, 잡지를 손으로 베끼는 영상 하나가 크게 화제가 됐습니다. 조회수 37만, 구독자 1만 4천 명 증가, 댓글 966개. 많은 사람이 두 달, 세 달, 심지어 6개월씩 필사를 해보겠다고 댓글로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댓글을 다시 읽어보니, 3일이나 일주일, 한 달을 채웠다는 사람은 있어도 두 달을 다 채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필사 제대로 하면 인생이 바뀐다.


이건 필사 자체가 효과가 없거나 사람들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이 필사의 1단계에서 멈추기 때문입니다.

필사는 1천 년 넘게 검증된 방법이다

필사는 새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300년 전 미국에서도, 조정래 작가도, 바둑의 조훈현·이창호 9단도, 재즈 연주자들도 모두 필사에서 출발했습니다. 필사로 얻는 가장 큰 것은 돈이 아니라 내면의 성장입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용기가 생기고, 솔직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패닉에 빠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낙천적인 태도가 길러집니다.

다만 진짜 효과를 보려면 1단계에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손글씨가 진짜 더 효과적일까

'펜은 키보드보다 강하다'는 제목의 연구에서는, 손으로 필기한 학생들이 개념 이해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2024년 노르웨이 연구팀이 뇌파를 측정한 결과도 흥미롭습니다. 손으로 쓸 때는 뇌의 여러 부위가 넓게 연결되지만, 자판만 칠 때는 이런 연결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손글씨냐 키보드냐는 사실 필사의 본질이 아닙니다. 진짜 본질은 따로 있습니다.

필사는 "공부"가 아니라 "훈련"이다

공부는 이해하면 끝나지만, 훈련은 몸에 익어야 끝납니다. 공부가 책으로 연애를 배우는 것이라면, 훈련은 실제로 연애를 여러 번 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훈련에는 반드시 시간이라는 개념이 들어갑니다. 파일럿이 되려면 200시간의 비행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요.

글쓰기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애초에 이런 훈련 시간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간표가 없으니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를 계속 의심하게 되는 겁니다.

서예에서 배우는 필사의 3단계

서예에서 교재를 보고 따라 쓰는 걸 "임서(臨書)"라고 하는데, 여기에 필사가 왜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1단계, 형임(形臨) — 글자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 씁니다. 아홉 살 아이가 한자 뜻도 모른 채 모양만 그대로 그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음악으로 치면 악보를 보고 그대로 연주하는 단계죠. 이때는 절대 내 식으로 바꾸지 않고 100% 원본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2단계, 의임(意臨) — 글씨에 담긴 뜻을 파악해서 표현합니다. 이제 머리를 쓰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3단계, 배임(背臨) — 원본을 충분히 보고 이해한 뒤, 법첩(교본)을 덮고 원본을 등진 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씁니다. 악보를 덮고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단계가 필사의 진짜 핵심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도 썼던 방법

배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예는 많습니다. 어릴 적 성경 구절을 외우려고 요약하고 요지를 말로 정리하던 과정 자체가 자연스러운 배임이었고, 이 훈련 덕분에 공부를 특별히 잘하지 않았어도 수능 언어·외국어 영역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경험담도 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글쓰기 훈련법도 정확히 이 원리를 따릅니다.

  1. 잘 쓴 글을 골라 끝까지 읽는다.
  2. 문장마다 요지를 아주 짧게 메모한다 (원본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3. 메모를 며칠 묵혀서 원본 기억이 흐릿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4. 메모만 보고 처음부터 다시 써본 뒤, 원문과 대조한다.

이건 단순히 베끼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과정입니다. 조정래 작가가 태백산맥을 필사시킨 목적도 글쓰기 실력 향상이 아니라, 매일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큰 성과로 이어지는지를 몸으로 체험시키려는 데 있었습니다.

1단계에만 머물면 벌어지는 일

형임 단계에만 계속 머물면 이런 흐름을 겪게 됩니다. 처음엔 원문을 보며 그대로 옮겨 적다가, 손이 문장을 외우기 시작하고, 결국 원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쓰는 상태가 됩니다. 내비게이션만 보고 운전하다 휴대폰이 없으면 길을 못 찾는 것과 똑같습니다. 머리는 할 일이 없어지고, 의식은 멀어진 채 손만 움직이는 "멍때리는 필사"가 됩니다. 결국 원본을 계속 펴게 되고,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됩니다.

배임으로 넘어가는 법 — "복기"

이 변곡점을 넘어가는 열쇠는 바둑의 복기와 같습니다. 프로 기사들은 대국이 끝난 뒤 기억만으로 두지 않고, 수백 수의 판을 처음부터 다시 놓아봅니다. 서울대 가는 공부법으로 흔히 언급되는 "책을 덮고 오늘 배운 걸 머릿속으로 복기하기"도 같은 원리입니다. 조훈현 9단이 이창호 9단에게 그가 둔 바둑을 복기시켜준 것도, 프랭클린이 메모를 며칠 묵혀둔 것도, 재즈 연주자들이 음원을 듣고 직접 채보하는 것도 전부 배임입니다. 내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 내 것이 된다는 말은 결국 배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 AI 시대에 배임이 더 중요해졌나

키보드로 필기하는 학생들은 강의를 거의 그대로 받아 적을 수 있습니다. 빠르고 놓치는 게 없지만, 학습 면에서는 오히려 해롭습니다. 반면 손글씨는 느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약하고 내 말로 바꿔 적게 되고, 이 과정에서 비로소 머리를 쓰게 됩니다. 보고 그대로 옮기는 건 눈에서 손으로 바로 가는 것이라 머리를 거치지 않지만, 원본을 덮고 써야 하면 반드시 내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와야 합니다. 그 "꺼내는 동작"이 실력을 만듭니다.

위조범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진품을 옆에 두고 그대로 그리는 위조범은 진품 없이는 아무것도 못 만듭니다. 반면 진품을 오래 관찰한 뒤 치우고 그리는 위조범은 머릿속에 구조가 들어 있어서 어디서든 만들 수 있습니다. 잡히는 건 언제나 전자입니다.

'필사'를 통해 인생을 역전하는 방법을 배우자


2023년 조사에서는 웹페이지의 35%에서 AI가 쓴 흔적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이제는 아무 글이나 베끼면 자칫 기계를 베끼게 되는 시대입니다. AI가 웬만한 수준의 글을 뚝딱 만들어주는 지금, 정작 중요한 건 그 글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는 눈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력은 직접 써보고 원문과 대조해본 사람에게서만 생깁니다.

4개월 실전 훈련 계획

1단계: 형임 (2개월) — 하루에 짧은 글 10편(잡지, 칼럼 등)을 손으로 옮겨 적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생각하지 말고 손만 움직이며 감각을 익히는 게 목적입니다. 볼펜 한 자루가 다 닳고 손가락이 아플 수 있지만, 한 달쯤 지나면 익숙해집니다.

2단계: 배임 (2개월) — 글 하나를 골라 문장마다 요지를 대여섯 글자로 짧게 메모합니다. 메모를 하루쯤 묵혀둔 뒤, 원문을 덮고 메모만 보며 글 전체를 다시 씁니다. 다 쓰고 나서 원문과 한 줄씩 대조합니다. 이 단계는 하루 한 편이면 충분하고, 손으로 쓰든 타이핑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핵심은 원본을 덮고 썼는지 여부입니다.

총 4개월, 하루 30분씩 약 60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중간 단계인 의임은 배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이루어지므로 따로 훈련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글로 필사해야 할까

  • 잡지: 여러 사람에게 검토받고 편집장에게 여러 번 고쳐진 글이라 교본으로 좋습니다.
  • 책 본문: 편집자 한 명, 저자 한 명만 보는 평범한 문장이 많아 추천하지 않습니다.
  • 개인 블로그 글: 아무도 검토하지 않고 올라가는 글이라 추천하지 않습니다.
  • 신문 칼럼, 사설, 학술지 초록: 데스크나 심사를 거치므로 좋습니다.
  • 협회 발간물, 베스트셀러의 서문: 서문은 출판사가 가장 많이 고치는 부분이라 대안으로 괜찮습니다.

4개월 뒤 얻게 되는 것

  • 확신: 남이 준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실력이라, 누구도 대신 가져갈 수 없습니다.
  • 용기: 스스로 뭔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 망해도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 솔직함: 자기 말로 쓸 수 있게 되면 남의 말을 빌릴 이유가 없어지고, 과장하지 않게 됩니다.
  • 낙천성: 망하는 상황 앞에서도 패닉에 빠지지 않고,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걸 몸이 압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손글씨냐 키보드냐의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앞으로는 베낄 만한 좋은 글 자체가 점점 줄어들 것이고, 고전이나 잡지는 더 귀해질 겁니다. 아마 이번에도 대부분은 두 달을 못 채울 겁니다. 하지만 형임과 배임, 이 두 단계를 알고 시작하는 사람은 1단계의 지루함을 견딜 여유가 조금 더 생깁니다.

지금 마음에 드는 글 하나를 골라, 형임과 배임을 모두 한번 해보세요. 생각보다 재미있을 겁니다. 베낄 때는 스승이 필요하지만, 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내가 나의 스승이 됩니다.

참조
30년동안 글 한번 안 써본 40대가 '글쓰기'로 인생 역전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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